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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by hannadipper 2025. 6. 13.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1], 동학 혁명(東學革命), 동학 운동(東學運動),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또는 동학 농민 전쟁(東學農民戰爭)으로 불리기 시작한 동학난(東學亂)은 1894년에 동학 지도자와 동학교도 및 농민이 일으킨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뉜다.

교조 최제우의 신원 외에도 조선 양반 관리의 탐학과 부패, 사회 혼란에 불만이 쌓이다가 1892년(고종 1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학정이 도화선이 되었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농민군은 흥선대원군, 이준용과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 반의하면서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민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하였고 농민군과 제휴하였다. 농민군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2]까지 거병 명분으로 삼았다.

한편 흥선대원군과의 연대를 못마땅히 여긴 김개남은 수시로 전봉준과 충돌하다가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방언은 농민운동 진압 직후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사면을 청하여 석방되었으나 민씨 계열의 관군에 살해당한다. 그밖에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의 지도자는 남접의 거병에 쉽게 호응하지 않다가 그해 9월의 3차 봉기 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개화파 지도자이자 망명정객인 윤치호는 동학 농민 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었다.[3]

초기에는 동학난, 동비의 난[4]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 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배경

동학농민군 측에서 사용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일본 세력과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의를 내세운다) 깃발

최시형의 인장
1882년 이후의 각종 사회 혼란과 정부의 부패로 민심이 동요하던 가운데 고부군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도화선이 되어 농민운동을 일으켰다.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난다.[5]

임오군란(壬午軍亂)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청나라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5] (톈진 조약을 파기시킬만큼) 민씨 정권에서 청나라 군을 끌어들여 개화파를 진압하자, 일본은 일본대로 청나라가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에 병력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혼란은 점차 가중화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5] 급기야 그것은 1894년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5]